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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생각들

비선 실세 잡는 ‘랜선 실세’


글=최승욱 고승혁 기자 applesu@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


국회 ‘최순실 청문회’가 핵심 증인의 출석 거부와 ‘모르쇠 답변’으로 ‘맹탕 청문회’가 되어가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해 청문회를 이끌고 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피어난 ‘230만 촛불민심’이 청문회장에서도 직접민주주의 형태로 발현되는 것이다. 이른바 ‘랜선 실세’로 불리는 시민들은 문자메시지, SNS를 이용해 국정조사특위 위원들에게 직접 제보하며 사실상 청문회를 주도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랜선 실세’란 인터넷망(랜·LAN)과 휴대전화를 이용해 국회의원들에게 제보 등을 전달해 성과를 올리는 시민들을 뜻하는 신조어로 최근 논란이 된 ‘비선 실세’에 빗댄 용어다.


국회 최순실 국정조사특위의 1∼4차 청문회에서는 시민들이 ‘청문회 스타’가 됐다. 15일 4차 청문회 도중 한 시민은 특위 위원장인 새누리당 김성태 의원에게 ‘위원장님, 아… 공개해줘요. 해줘요, 해줘요. 멋쟁이 의원이 해줘요. 제일 잘생긴 김성태 위원장님이 공개해줘요. 쿨가이’라는 문자를 보냈다. 당시 김 위원장은 조한규 전 세계일보 사장이 제출한 양승태 대법원장 사찰 의혹 문건 공개 여부를 고심하던 중이었다. 결국 김 위원장은 법적 검토 후 직접 문서를 취재진 앞에 들어 보였다. 정의당 윤소하 의원도 청문회장에서 한 시민이 문자로 보내온 명단을 참고해 ‘언론 부역자’ 10명의 증인 채택을 요구했다.


지난 7일 2차 청문회에서는 시민들의 직접 제보가 위력을 발휘했다. 끝까지 최순실을 모른다던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증언이 시민들의 제보를 통해 거짓말로 드러났다. 국조특위 위원인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남양주시에 사는 국민이 문자메시지로 보낸 2014년 ‘정윤회 문건’을 근거로 김 전 실장의 ‘자백’을 받아냈다. 같은 날 박 의원이 공개한 2007년 7월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대선 후보 검증 청문회 영상도 한 시민의 모바일 메신저 제보였다. 같은 당 손혜원 의원실에는 청문회 기간 내내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행방에 대한 제보가 쇄도했다. 의원들은 시민들이 보낸 질문을 그대로 질의에 반영하기도 했다.


청문회 진행 도중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는 시민들이 국회의원들과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담은 ‘인증샷’도 쏟아졌다. 최근 새누리당 의원들의 휴대전화 번호 유출도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에 한몫했다. 새누리당 장제원 의원은 4차 청문회 당일인 15일 하루에만 5000건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장 의원은 직접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든 ‘셀카’를 찍어 답변을 보냈다.


국조특위 위원들도 시민 참여가 청문회에 큰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16일 “청문회 도중 문자나 SNS 댓글이 순식간에 1000개씩 달린다”며 “청문회를 진행하다 보면 놓치는 부분이 있는데 시민들의 지적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박영선 의원은 “새로운 특징은 교수, 의사 등 전문가 그룹이 전문지식을 많이 보내준다는 것”이라며 “세월호 7시간 청문회(3차) 때는 의사들이 전문용어 해석이나 주사 소요시간 등 전문지식을 엄청나게 보내왔다”고 했다. 윤소하 의원은 “문자나 SNS로 들어오는 제보를 확인 없이 바로 공개하긴 어렵지만 질의 과정에서 현장감을 살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며 “이렇게 많은 국민이 청문회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다”고 말했다.


욕설과 협박 문자들은 청문회 진행을 위축시키기도 한다. 한 새누리당 의원은 “겁이 덜컥 날 정도로 무서운 폭언 문자가 들어올 때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논리적 비판은 도움이 되지만 간혹 무서운 문자들도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증인의 발언이나 태도에 시민들이 일희일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정치사의 새로운 단면이라고 평가했다. 이내영 고려대 교수는 “이번 청문회에선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중간에 있는 ‘참여적 대의민주주의’가 구현됐다”며 “국민의 대표성이 강화되고 시민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가 늘어 민주주의 이상에 가까워졌다”고 분석했다. 김민전 경희대 교수는 “이번 청문회는 국민의 집단지성이 집약적으로 발휘된 일종의 공개수사”라며 “국민들이 김기춘 전 실장의 위증을 잡아냈다”고 말했다.